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부산시 동삼동에서 출토된 조개탈은 기원전 5천년쯤 신석기시대에 이미 탈의 형태가 있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다. 고구려
고분 벽화(안악 제3호분 동수묘 무악도)에서는 외국인 모습의 탈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그림이 보인다.
탈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유물은 신라시대의 '목심칠면'을 들 수 있다.
(경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)
이 탈은 죽음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'방상씨' 탈로 고대 신라시대부터 장례에 탈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.
"신라의 황창이라는 7세의 소년이 백제왕 앞에서 검무를 추면서 백제왕을 질러 죽인 후 죽임을 당했는데, 이를
슬퍼한 신라인들이 황창의 모습을 본떠 탈을 만들고 검무를 추었다."[동경잡기],[문헌비고]는 삼국시대의 기록이
있다.
[삼국사기]에도 당시 행해진 다섯가지 놀이(대면, 속독, 산예, 월전)를 소개하고 있는데{최치원[향약잡영]}
그 가운데 대면은 황금색 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 무서운 춤을 추는 놀이이고, 속독은 쑥대머리에 파란색의탈을 쓰고 왕의
덕을 칭송하는 것이며, 산예는 사자탈을 쓰고 추는 사자춤을 말한다.
한편, [고려사]에는 탈을쓰고 놀이를 하는 사람을 '광대'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. 또 [어유야담]에는 당시 직업적인
광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.
"한강 위에서 나무로 만든 귀신의 탈을 쓰고 걸식을 한 광대가 있었는데, 봄이 되어서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
아내와 강을 건너게 되었다. 중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아내가 강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에 놀란 광대는 탈을 벗을 생각을
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통곡을 하며 도움을 청했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연극을 하는 줄 알고 웃고 있었다,"
(어우야담)중에서
궁중제의나 나례 등에 주로 연희되었던 탈놀이는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서민의식의 향상과 더불어 신앙적인 측면보다는 양반사회에
대한 풍자와 비판이 더욱 강조되면서 지금의 놀이형태로 전해지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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